野球少年とラベンダー少女の恋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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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월상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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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이미지와 텍스트 전부 있으니 편하신 방법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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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늘한 손이 이제는 익숙했다. 시안은 능청스러운 손을 제 어깨에서 떼어냈다.

  “더워.”

  더위를 느끼는 몸도 아니게 되었는데 잘도 말한다고 생각되었다. 한편 그에게 달라붙은 카즈야로 말하자면, 본래 그런 것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시안의 냉랭한 어조에도 별다른 말은 없었다. 시안은 그 괴리를 기묘하게 여길 때가 종종 있었다. 심술궂은 미소, 그것과 별개로 퍽 다정스럽게 여겨지는 손짓, 그리고 그 전부에 취할 것 같으면 잊지 말라는 듯 다가오는 서늘한 체온 같은 것…. 카즈야는 마치 모순으로 이루어진 생물 같았다.
  하기야 크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었다. 생이라는 것은 대개 무엇을 취하며 이뤄지는 것이고 또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인데, 카즈야에게도 시안에게도 그런 것은 없었으니까. 없게 되었으니까. 속박도 없이 그리고 또 열정도 없이 둘은 카즈야가 허락한 영토 안에서라면 영원까지도 그려볼 만했다. 아득한 영원을 뒤로 하고 카즈야의 손이 시안의 목덜미를 느리게 훑었다. 유려한 손가락, 자라지 않는 손톱 같은 것이 시안의 눈을 끌었다. 시안의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고 있는데 카즈야의 것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으며 흩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당신처럼 되는 것이 나을까?”

  “뭐가?”

 

  카즈야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세상 바깥을 뒤집어 놓았다고-어쨌거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하나의 나라가 파편처럼 너절해졌고, 그것은 시안과 관계없는 인간의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었다.-숲 바깥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을 저지른 주체라고 하기에는 태연한 낯짝이 아닐 수 없다. 그처럼 시안이 인식할 수 있는 거의 모두가 카즈야를 빗겨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 노화, 성장….
  시안으로 말하자면 그렇지가 못하다. 복수가 끝난 다음 시안은 오래도록 잠들었다. 남자의 말을 믿는다면-사실 믿을 수밖에 없었는데, 숲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제대로 된 시간의 기록이 남지 않는 이곳에서야 남자의 말이 곧 세상을 재단하는 법칙이나 다름없다.-세 해는 잠들었다 일어났다고 했다. 시안에게는 마치 어제 같은 일이었다.
  카즈야는 시안의 세 해 전 마지막 말이 잘 자라는 인사였다고 했다. 빈정대는 어조는 아니었는데, 사뭇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잠들지 않았고 시안은 아직 잠들 줄 알았다. 시안에게 있어 그건 제법 비꼬는 말처럼 들렸다. 세 해 전의 그는 카즈야를 비꼬고 싶었던 것일까? 막 일어나 멍한 머리로 그 질문이 어떤 욕설이나 모욕처럼 들릴 것이지는 않았느냐고 시안이 물었을 때, 그는 그냥 이렇게 말하기만 했다.
  난 원래 잠들지 않는 존재인데, 네가 인간답게 묻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겠어? 그건 그냥…네가 아직 인간의 습속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인 거잖아, 시안. 하지만 놀라운 일이야. 왜 너는 아직 마녀인 너와 인간인 너를 분리하지 못한 걸까?
  오히려 시안 쪽이 모욕을 느낄 만한 내용이었는데도-왜냐하면 카즈야가 그의 출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고 또 그는 바로 그 출신, 인간됨을 위해 인생을 걸고 복수한 셈이므로 그렇다.-그 말투는 드물게 퍽 진지했다. 그래서 시안은 화내는 대신 글쎄, 하고 이야기했다. 시안 자신도 이유를 모르니 대답이 다소 밋밋하게 나왔다.
  이제는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보다 마녀로 또 남자의 종속으로 살아온 세월이 더 길었는데 이상하게 사람으로 살던 시기의 버릇은 몸에서 빠지는 일이 없었다.
  시안은 여전히 잠을 잤고-삼 년 잠드는 것은 이미 인간적이지는 않았지만.-단 술을 즐겼고, 또 머리가 길고 손톱과 발톱이 자라기도 했다. 차라리 카즈야처럼 아예 멈추어 버린다면 다른 감상을 안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흐를 듯 흐르지 않는 시간, 노화는 없으되 변화는 있는 신체는 인간인 시안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안은 자신이 오래 잔 것도 그 기묘한 시간의 흐름이 주는 압박을 철저히 인간답게도, 무시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
  아무렴 사람이었던 기억이 아직은 선명했다. 카즈야의 입술이 시안의 목덜미로 기울었다. 그는 입술의 감촉으로 카즈야가 입을 벌리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라면 그 입을 벌릴 때 내뱉는 숨결로서 알아차리겠지만, 카즈야의 숨은 서늘하기만 했으므로 시안은 입술이 미끄러지는 감촉으로써 판단해야 했다.

  “많이 배고팠어?”

  “그럴지도.”

 

  카즈야와 시안이 공유하는 유일한 감각이란 고작해야 배고픔뿐일 것이다. 그는 쓰게 웃었다. 그가 깨어난 뒤로 카즈야는 놀랄 만큼 다정해졌다. 어지간한 일로는 시안의 말에도 능청스레 대꾸하기보다, 그래, 하고 긍정했고, 대신 서늘한 손으로 시안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댔다.
  사람이었던 시절에는 이토록 그에게 가까이 접한 이가 없었다. 그 시절 시안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타인과 접촉할 경험이 많았지만, 왕자와 한 약혼이란 고작해야 재산 혹은 권력의 결합이었으므로 시안이 할 일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가치를 결혼하는 그날에 맞추어 보존하는 것 하나뿐이었던 까닭에 누군가와 닿을 이유나 필요성은 없었다. 그리고 시안은 필요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제 와서는…시안은 자신의 변화를 파악했기 때문에 쓰게 웃어야만 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닌가? 시안은 카즈야에게 어떤 식으로건 대가를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문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계약한 바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남자의 손이 시안의 목을 흐르는 혈관을 긁듯이 찾았다. 그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따라 카즈야의 입술 역시도 목을 따라 내려왔다. 턱 바로 아래, 얼굴과 목의 중간, 흐르던 손가락은 어깨와 목을 잇는 근육 중간에서 멈추었다. 시안은 카즈야가 만지는 순간순간 자신의 신체를 의식했다.

  “인간은 섬세하니까 말해주는 거야.”

 

  시안이 웃음을 터뜨리려던 순간 카즈야의 이가 시안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통증은 없었다.

 

  “하아….”

 

  나른한 숨이 오후의, 혹은 어떠한 광원이 비추는 그들 저택의 창문을 비추었다. 시안은 영원히 여름에 멈추어 있을 것 같은 정원을 바라보며 창틀을 꽉 쥐었다. 목 바깥으로 생기와 같은 것이 흘러 나가는 기분, 그리고 배 안쪽이 간질거리며 명치 위까지 타고 오르는 감촉이 있었다. 그것을 참아내기 위해 그는 손톱으로 긁어내듯 검은색 단색의 창틀 페인트를 긁어냈다.

 

  “흐, 흐으….”

  “신음해도, 상관없는데.”

 

  카즈야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그것이 카즈야의 목이 울리기 때문인지, 혹은 그의 의식이 희미해지기 때문인지 그는 잘 알 수 없다. 이런 경험은 인간이었던 시절 혹은 괴물이-카즈야는 그것이 더 우월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시안으로서는 인간이었던 세월이 너무 길어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직은, 혹은 영원히.-었던 시절 어디에도 없다. 이토록 기분 좋고 또 황홀하며 또….
  카즈야의 입술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시안은 제 입술이 벌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의식해서는 아니며 다만 카즈야가 다정스레 그의 입술을 검지로 훑어 정리해 주었던 까닭이다.

 

  “정신을 못 차리네.”

  “그게…나빠?”

  “나쁜 건 아니지, 오히려 내게는 아주 좋은 일이야, 아가씨.”

 

  마치 시안의 입술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만지던 손가락이 입술 안쪽의 축축한 살점을 훑고 들어왔다. 검사하듯 혹은 감상하듯 남자의 손가락이 시안의 잇새를 만지작거렸다.
  송곳니를 유독 오래 만진다는 감상과 함께 시안의 멍한 정신은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떨어지지?”

 

  그는 카즈야의 손을 던지듯 뗐다. 쳐낸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얼굴이 붉은 것 아나? 아가씨는.”

  “아가씨가 아니고 시안.”

  “아차차, 까먹어버렸네.”

 

  잊는 일이라고는 없는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시안은 얄미웠다. 후천적인 괴물에 가까운 그와 다르게 이 남자의 의식이라거나 기억, 생태 같은 것을 시안은 아직 몰랐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서 시안은 남자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가 시안보다 강하기 때문에. 시안이 꿰뚫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잘난 사람을 만나본 적 없는 어린 인생은 남자가 인간이 아님을 자각하게 될 때 다소 휘청거렸다.
  붉어진 뺨을 유리창에 기대며 시안은 남자를 바라봤다. 퍽 건방지게 손을 쳐냈는데, 카즈야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허락처럼 여겨졌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가 가진 특권처럼 느껴졌고, 가진 모든 것을 잃어 복수를 다짐한 그에게는 말도 안 되게 단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어느 것도 의미가 없고 또 무력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남자의 태도만이 달콤했다.


  “아까는 왜 웃으려고 들었어?”

 

  남자가 시안의 눈 아래, 뺨을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감촉이 아니라 시안은 다소 놀랐다. 본디 정이 없는 편인 그로서는 사람의 체온이 닿는 것이-물론 카즈야에게는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없다.-이토록 불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사사로운 깨달음이 뒤따랐다.

 

  “당신이….”

 

  시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 말을 꺼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또 남자가 그를 비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카즈야는 여상하게도 다정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 어쩌면.
  시안은 세 해 전 잠든 것은 카즈야가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카즈야는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조금도 알지 못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시안은 다정하게 느껴지는 눈에 텅 빈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그가 무엇을 보든 카즈야는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잊은 지 오래다.
  복수가 끝난 뒤의 나날은 하염없이 비어 있었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나 있었고 시안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세 해 전의 시안을, 시안은 겨우 기억해냈다. 바야흐로 어디로 가야 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망가뜨릴 생각을 하기란 그렇게 쉬웠는데…. 차라리 그 시절이 조금 더 열정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가라앉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건강하지 않은 생각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시안은 카즈야의 숲에서 비극을 앓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건 사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아직 좋았다. 시안에게 이것을 하라거나 저것을 하라고 안내하는 지침에 세상에는 얼마든 있었다. 그 속에서 시안은 스튜어트의 가장 귀한 아가씨였고, 부모의 총명하며 여린 딸이었으며, 왕자의 하나뿐인 약혼자였다. 그는 그 틀에 맞추어 연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들은 시안이 무슨 생각으로 연기하는가보다는 시안이 어떤 식으로 연기하는가에 대해 더 흥미를 가졌다. 그들 사이에서 시안은 춤을 아름답게 추는 아가씨이기도 했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후계자이기도 했으며 누군가가 의지하고 바라야 할 대상이었다.
  그것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는 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명령하는 사람도 또 기대하는 사람도 또 그를 숭앙하는 이도 없어져서…시안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도 좋은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삶은 지독하게 고귀한 속죄양이나 다름없는 인생이라고 말한다면 그조차 없이 배를 곯는 이들이 욕할 것이다. 그러나 또 동시에 복수를 마친 시안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 모르는 양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대가로 하여 제사를 마쳤는데 죽을 각오를 한 제사가 끝나도록 카즈야는 그의 배를 가르지 않았고 또 그를 제단에 바쳐 제를 올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안은 함께 바쳐진 제물 사이에서 유일하게 생환한 존재가 되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제단에 올라가기 위해 산 삶이었는데…제사는 이미 끝났고 올라갈 제단은 없으며 이제 메에메에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이유로 시안은 잠에 취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지 않는 오전은 무료했고, 이곳에는 시안에게 지시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또 시안에게 무엇을 바라는 이도 없었다. 세 해 전의 카즈야는 시안을 지금처럼 시안에게 무엇인가 바라는 듯한-시안은 남자가 명확하게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알았다. 그것은 인간일 적도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가 간직하고 있는 재주의 하나다.-눈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안은 스스로 눈을 뜰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당신이 인간인 것처럼 잊었다고 말해서 웃었어. 당신은 무엇을 잊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시안은 그 뒤에 남자의 이름을 덧붙여 보았다.

 

  “카즈야.”

 

  이름을 부르자 남자가 웃는다.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서늘한 웃음이었다. 체온도 없고 거리낌도 없으며 끝도 없는…이 남자의 모든 것은 대개 그런 것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시안은 이 남자의 정의할 수 없음이 좋았다. 세상의 많은 일은 꿰뚫어 볼 수 있고 또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알아차리기 쉬운 일이다. 그런데 이 남자만은…시안은 이런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갑자기 쑥스럽게 만드네, 미인에게서 불리는 이름은 언제나 좋거든.”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얼굴로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남자가 웃었다.

 

  “시안.”

 

  그리고 그가 그랬듯 덧붙였다. 카즈야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같은 발음, 같은 구조의 언어인데도 어딘가 사람의 말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시안은 제 이름을 한 번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시안. 그렇게 말해도 카즈야가 부르는 시안이라는 단어와는 다르다. 이것은 아직 사람의 말 같았다. 카즈야의 것이 아득한 별을 말하는 단어처럼 들린 것과는 달랐다.
  카즈야와 그는 대개 반 정도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세월의 차이가 둘 사이에 그런 선을 긋는 것일까. 그는 문득 이 남자는 자신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지 궁금해진다.
  아니다. 문득, 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사실 시안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가 매몰되어 가는 이 무료와 영겁에서 이 남자는 어떻게 버티어 오고 있는지.

 

  “카즈야가 말하는 내 이름은 조금 다르게 들려.”

  “어떻게?”

  “뭔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들리거든.”

 

그는 꿰뚫린 목덜미를 쓸어 보았다. 몇 번 만져보지도 못한 채-분명한 송곳니 자국이 남았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 신기했다.-손목이 잡혀 곧 멈추게 되었지만.

 

  “왜 막아?”

  “싫어서.”

 

  사람의 말이라면 이것은 분명 너를 상처 입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런 것이라면 좋을까? 좋을 것 같았다. 시안은 작은 무엇인가가 안에서 움트는 듯한 간질거림을 느꼈다. 그건 피를 전할 때 느끼는 아찔할 정도의 쾌감과도 또 복수가 주는 꽉 찬 듯한 열렬함과도 다른 것이다. 파악할 수 없는 갉작임 혹은 간질거림이 시안의 문을 두드렸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낯선 순간 위로 시안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카즈야의 손목을 떼어내고 다시 한번 상처를 벌렸다. 아픔은 없었다. 다만 피 냄새가 조금 났다. 그에게는 달콤하지도 또 아찔하지도 않은 것이지만, 카즈야에게는 다를 것이었다. 카즈야의 핏방울도 또 그에게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시안은 알았다.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말을 참 안 들어.”

  “내가 왜 카즈야의 말을 들어야 해?”

 

  손짓이 시안의 손목을 조금 세게 결박했다.
  시안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해도 의미 없다는 이유로서는 아니었고, 저항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다.

 

  “이유가 궁금한데 말해준다면.”

  “인간은 이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 잠시 잊고 있었네.”

 

  카즈야의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흘렀다. 흐르는 피가 아쉬운 것처럼 서늘한 입술이 그의 목을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이유…아, 읏….”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시안의 허리를 카즈야가 쥐고 지탱했다. 자연스럽게 시안의 손이 카즈야의 어깨를 쥐었다. 가까운 접촉이라고 의식할 틈도 없이 시안은 신음을 참으며 울었다.

 

  “이유…말이지.”

 

  카즈야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래, 이, 흣…이유.”

 

  꽉 쥔 손을 떼어내며 쾌감도 서늘함도 사라져 간다. 시안은 멍한 시선을 올렸다. 카즈야가 웃었다.

 

  “인간은 약하니까.”
  서늘할 정도로 다정한 웃음이었다. 그 손이 시안의 허벅지를 쥐었다.

 

  “그거 알아, 시안? 인간은 너무 약해서…돌봐주지 않으면 곧 죽어버리고 말거든. 그리고 그렇게 되면….”

 

  카즈야에게 쥐인 허벅지 안쪽에서 핏줄이 맥동하는 감각이 일었다. 시안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카즈야의 목소리가 천천히 멀어진다.

 

  “더는 네 피를 마실 수 없지 않겠어?”

 

  어떤 의문이 생기려다가도 스러진다. 잠들기 전에는 내 피를 그렇게 마시진 않았던 것 같은데, 무언가를 탐욕스럽게 바라는 성품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문은 곧 쾌감에 지워진다. 시안은 뻗으려던 손을 놓았다. 부연 시야 속에서 창틀을 혹은 의지할 만한 무엇을 쥐면서 그는 자신 안을 채우려던 시도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우리들은 이렇게 고일 것이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영원하게,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먹이가 되어서. 그렇다면 이제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中 : 창문 밖을 보는 여자

下 : 라벤더를 피우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