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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31 , 2022
ⓒ 시월상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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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스튜어트는 이 공간이 그가 아는 그 어떤 공간보다 부유하고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한때 벽면에는 나라에서도 손에 꼽히는 솜씨를 가진 미술가들이 그린 회화가 걸려 있었고, 기둥 옆에는 몇 세대 전 예술의 부흥을 이끌었다던 도예가와 조각가가 빚어내고 바수어낸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간은 그야말로 역사가 빚어낸 건축물이었으며 방문하는 이들은 모두가 경외를 느끼고 그에 고개 숙였다. 모든 것이 아주 오래전에나 있었던 일이다.
이제 이 건축물은 까슬까슬한 가문비나무에 멋대로 짓밟혔고, 질긴 가시가 멋대로 돋아난 청가시덩굴에 얽매였다. 그는 화려한 양감이 새겨진 기둥을 회갈색 가시가 긁어놓은 장면을 바라보며 자못 흐뭇해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복수가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할 테지만, 시안 스튜어트에게 있어 복수는 일종의 추모를 겸했으므로, 이것은 절대로 의미 없는 일이 될 수 없었다.
“이제 만족했어?”
발걸음 소리도 없이 다가온 남자가 물었다. 시안 스튜어트는 기쁘게 웃었다. 시안, 스튜어트. 본래의 자리를 되찾은 자신의 이름을 입에서 굴리자 달콤한 감각이 혀끝에 맴돌았다.
“만족했어, 이보다 더한 복수가 있을까?”
그는 이제 이 건축물에서 가장 심부에 있는, 그리고 가장 정교하며 세련된 장식물을 들여 둔 공간에 있다. 한 점 먼지조차 없이 관리되곤 했던 바닥과 벽은 이미 신록에 잡아먹혔다.
“만족스럽네, 꽤 마음에 들어.”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도 웃을 줄 아네.”
“그동안은 웃을 일이 없었던 거라곤 생각 안 해?”
“난 그래도 아가씨에게 꽤 많은 일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는데?”
“부정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기쁠 일은 없었어.”
“저런, 서운해라.”
남자가 아쉬운 얼굴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시안 스튜어트는 가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그러나 둘 모두가 지금이 그에게 있어 아주 기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모든 힐난과 비난은 가벼운 것 이상이 되기는 힘들었다.
“빌어먹을 계집!”
늙어빠진 목소리가 소리쳤으므로, 시안 스튜어트는 소리가 들리는 장소로 걸어갔다. 구두와 같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는 맨발로 덩굴 위를 춤추듯 걸었다. 실제로도 춤을 추라면 출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었기 때문에, 발이 동동 떴다.
“꼭 소녀 같이 걷네.”
“영원한 소녀로 남을 테니, 그런 비슷한 게 아닐까?”
“주름이 생기면 어쩌려고?”
“당신 피가 그 정도 위력밖에 없어?”
“야, 야, 이거 참, 절대 생기지 않게 해줄게.”
추하게 늙고 탐욕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그를 바라보며 분노에 차 외쳤다.
“저주받을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저주는 나의 스튜어트를 무너뜨리기 전에 했었어야지.”
시안 스튜어트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왜?”
“당신 신발 좀 빌려줘.”
“갑자기? 독특한 취미네. 갑자기 남자 신발에 관심이라도?”
“설마.”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시안 스튜어트의 발을 묘한 광택이 도는 검정 가죽이 감쌌다.
“생김이 영 마음에 안 드네.”
남자의 취향은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안 스튜어트는 발목을 가볍게 쓸어올렸다. 숲 바깥에서 그는 대단한 힘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남자가 건네준 힘을 다듬어 쓸 정도는 됐다.
“이런 정도는 되어야 신을 만하지.”
남자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하여간 취향 참 까탈스러워.”
“마녀 같은 계집!”
허공에서 구두가 태어나고, 구두가 그의 발에 걸맞게 형태를 바꾸었다. 그것은 시안 스튜어트가 이 모든 일을 겪기 전까지 분명히 알지 못하던 세상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마 이 어리석은 왕에게도 꼭 같아질 일이어서, 그는 왕이 어떤 경악과 불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지 잘 알았다.
“정답이야. 맞춘 걸 축하해줘야 할까?”
그는 구두를 신은 채 덩굴로 바닥에 결박당한 왕의 이마를 짓눌렀다.
“그래서 달라고 한 거였어?”
“밟으려는데, 더러운 걸 맨발로 밟기는 싫잖아.”
“야, 야, 아가씨, 정말 세다니까.”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본 적 없다는 듯한 어조가 오늘만큼은 거슬림이 없었다. 복수에는 어쩌면 이만한 관객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냉정하며, 복수자도 복수의 대상도 그저 한 줌 단의 먼지처럼 여기는 그 어떤 절대적인 시선…어쩌면 신의 눈과 같은 것.
시안 스튜어트는 신과 같이 강대한 남자를 마주 보고 방긋 웃었다.
“당신을 만나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마음에 드는걸. 이건…그래, 선물로 할까?”
남자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시안 스튜어트는 그 간결한 동작에 얼마만큼의 위력이 담겨 있었는지 경험으로 깨달은 바 있었으므로, 꿇어앉은 추한 위정자 뒤로 두 사람이 덩굴에 결박되어 쏟아져나왔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폐하!”
“왕자!”
“이들이 어찌!”
시안 스튜어트는 잠시 단란한 가족 상봉의 때를 맞이했다. 꿇어앉은 왕의 눈이 시커멓게 죽고, 한때 그가 약혼자로서 성실을 다한 대상이 비루먹은 얼굴로 외쳤다.
“어떻게 네가!”
“어떻게 네가, 나도 그 생각을 참 많이 했지.”
그는 과거에 약혼자로 여겨야만 했던 남자를 비웃었다.
“난 너에게 충실했어. 우리 집안도 그랬던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거야.”
굽으로 남자의 어깨를 짓이길 때마다 그의 가슴에 말간 희열이 차올랐다.
“어찌나 충실했는지, 우리는 그 권세를 가지고도 네 어미와 아비의 손에 목을 내주었고.”
그는 모두가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시절을 기억했다. 뼈를 갈아 복수할 수 있다면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는 과거에서 태어나 현재에 열매를 맺었다.
“열매를 심은 건 네 잘난 어미와 아비야.”
어떻게 네가? 어떻게 너희들이? 그는 숲을 달릴 때 몇 번이고 생각했다. 어떻게 너희들이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가? 사람의 탈을 쓴 이들 중 그의 응답에 대답한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거나 그를 배신했으므로 그는 인간 아닌 이의 손을 잡아야만 했다. 사람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복수를 빚어낸 것은 바로 그 손이었다.
시안 스튜어트는 무지한 손을 짓밟았다. 짐승 같은 신음과 모독과 오욕을 담은 비난이 그를 향했으며 종내에는 애원이 들려왔다. 그는 왕좌에 오를 수도 있었을 남자의 양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리고서야 발을 떼었다. 그 모든 과정을 뒤에서 남자가 바라보고 또 침묵하는 기척이 났다.
“아무 말도 안 하네.”
그는 짐승보다도 못한 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놓았다.
“할 이유가 있어? 아가씨는 복수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가씨를 응원하는 처지야, 하고 남자가 덧붙였다. 남자의 손바닥이 맞부딪혀 가벼운 소리를 냈다.
“내 뜻은 이 건물 전부를 숲으로 뒤덮는 것으로 전한 줄 알았는데.”
“그건 고맙게 생각해.”
“이거 꽤 귀찮다고?”
“그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남자와 이야기할 때만은 뒤에서 아우성치는 복수의 결과물에, 과한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일까? 시안 스튜어트는 자문하는 대신 남자의 손을 잡았다.
“어떤 게 좋은 복수일 것 같아?”
“그건 아가씨가 알지 않을까?”
남자가 익숙하게 그 손을 잡아, 그의 몸을 가볍게 돌렸다.
그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젊은이와 그 부모를 두고 춤을 추었다. 비명과 절규, 욕설은 하나의 교향곡으로 삼았다. 관객은 셋이나 그와 남자의 춤을 지켜봐 주고 있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이런 밀도 높은 춤을 춘 적이 없었다.
“시선이 뜨겁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이런 것도 나름대로 신선하고 좋은데?”
다정스레 허리를 감은 손이 그의 허리를 장난스레 두드렸다.
“옷도 더 화려한 걸로 입을래?”
“당신 취향 최악이라서 싫어.”
“그럼 아가씨가 하는 건?”
“여긴 숲 바깥이라, 그렇게 하기 힘들단 걸 알잖아.”
비명이 외쳤다.
“우리들을 가지고 노는 거냐?”
그는 대답했다.
“너희들이 나의 스튜어트를 가지고 논 만큼.”
그는 한 곡조가 끝날 만큼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남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한 곡 더?”
“아니, 질렸어.”
“그러면 이번엔 꽃을 피울까?”
“무슨 꽃?”
“글쎄, 보통 무도회장의 정원에는 무슨 꽃을 심지?”
“당신 때에는 무슨 꽃을 심었어?”
“그것도 글쎄다. 붉은 장미였던 것 같기는 해.”
“그럼 아몬드 색 장미로 해.”
“취향도 참 특이하네, 우리 아가씨는. 어렵진 않지만….”
그는 장미를 한 송이 꺾어 남자의 단춧구멍에 꽂았다.
절규가 으스러졌다.
“고문하지 말고 차라리 죽여!”
그는 대답했다.
“너희들이 나의 스튜어트를 고문한 만큼만 기다려.”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죄인들을 결박한 가시덩굴이 더 세게 조여가기를 기대했고, 실제로 비명이 현상을 증명했다. 더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는 남자의 단춧구멍에 조금 더 예쁘게 보이도록 장미가 꽂히는 일에 골몰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나, 우리 아가씨는?”
“당신 몰라?”
“뭘?”
그는 싱그럽게 웃었다. 그가 일찍이 했어야 하는, 마땅히 그랬을 방식으로 웃었으므로, 그건 시안 스튜어트의 데뷔를 장식하기에 걸맞은 웃음이 됐다.
“데뷔할 때에는 원래 춤을 함께한 상대에게 꽃송이를 건네는 거야.”
“흠…파트너로 인정해주는 걸까?”
“글쎄?”
그는 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욕설이 기괴하게 눌렸다.
“빌어먹을 마녀….”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축하해, 네가 만든 마녀라고 해도 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숨이 달콤했다.
시안 스튜어트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 웃었다.
“음…그냥 갈까?”
“재밌는 방식으로 복수하네.”
“셋이서 서로를 뜯어먹게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아주 세련된 방식이기도 하고.”
남자가 팔짱을 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이에 팔을 부드럽게 끼워 넣었다. 어떤 두려움이 다소간 몸집을 움츠렸고, 그는 미래에 대한 도전을 할 자신을 얻는다.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힘을 이 남자에게서 얻고, 복수를 완성하기 위한 열화와 같은 조롱 속에서 얻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시안 스튜어트는 그네들의 말대로 마녀다.
“역시 마녀답게 빗자루로 날아가고 싶은데, 그렇게도 해줄 수 있어?”
“아가씨가 원한다면.”
“아무도 이곳에는 들어올 수 없도록, 저기 드리운 청가시덩굴에 마법을 걸어줘.”
“그것도 아가씨가 원한다면.”
“오늘 굉장히 후하게 구네.”
“그동안 그렇게 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만일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면,”
남자가 장난스레 웃었다. 기괴할 정도로 소년 같아 보이는 웃음이라 시안 스튜어트는 얼마간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불쾌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건 아가씨가 내게 바라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일 거야.”
그가 잠시 입을 다문 사이, 남자가 손짓했다. 손짓을 따라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덩굴이 자라나고 시간이 움직였다. 그가 남자의 숲에서 해낼 수 있는 것 이상을 너무도 가볍게 해내는 남자를 보며, 그는 오랜만에 호승심 비슷한 것이 들었다.
“얼마나 오래 살면 당신처럼 할 수 있게 돼?”
“음…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이길 날이 올까?”
“음…정직하게 이야기해줄까?”
“어디 해봐.”
“무리지. 우린 그런 계약이잖아.”
남자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가볍게 웃었다. 재수 없어. 시안 스튜어트는 짧게 중얼거렸다.
“너무하네, 은인인데.”
“앞으로 백 년 천 년 우려먹을 생각이야?”
“기억하는 동안은?”
“좀 짜증 나.”
“하하!”
경쾌한 웃음소리가 시야를 갈랐다. 시안 스튜어트는 돌로 만든 건축물이 녹아내리고, 빈 공허를 짙은 색 덩굴과 가시가 빽빽하게 채우는 모습에 살짝 압도당했다.
“갈까?”
남자의 손에는 부드러운 떡갈나무로 만든 빗자루가 들려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잠시 떠나온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다. 이제 그는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도 수종과 식생, 축생의 종류 따위에 더 눈이 밝았다. 허공에 대한 두려움은 경이에 압도당한다.
시안 스튜어트는 자신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식의 변화는 도리어 기꺼웠으므로 그는 좌절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그가 뒤로 하고 떠나는 것들과는 달리, 오히려 아주 기뻤다.
이것은 자유처럼 생각되었다.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알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을 힘을 가지면서도 자유롭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가! 그는 빗자루 위에 다소 느리게 걸터앉았다. 남자가 미리 마법을 걸어둔 것인지, 아주 조금의 힘으로도 빗자루는 둥실 떠올랐다.
“사이로 빠져나갈까.”
“꽉 잡아.”
남자가 그의 허리를 꽉 쥐었다. 그는 황당해서 뒤를 돌아봤다.
“내 허리 말고 빗자루를 잡아야지.”
“내가 왜?”
그러나 뻔뻔한 얼굴에는 이길 도리가 없다. 그리고 “사실 높은 곳,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하는 속삭임에도. 그는 자신이 배려받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가 배려도 할 줄 안다니.
시안 스튜어트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인지와 함께 땅을 박찼다. 곧 바닥이 멀어지고, 가장 고귀했을 수도 있었을 인간들이 아우성치는 소리도 흩어지고 흐려지며, 달과 별, 새파랗고 시커먼 어둠이 그들을 잡아먹었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가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남자가 그를 붙든 그 감각.
달과 별은 너무 깊은 어둠 속에서 원근감을 없앴다. 하룻밤 사이에 숲에 잡아먹힌 옛 시대의 궁전은 더 이상 밝게 빛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남자가 있다.
그가 손을 떨 때마다 남자가 가볍게 빗자루의 키를 틀어 방향을 바꾸어 주었다.
“내가 아가씨를 떨어트릴 것 같아?”
그 목소리에서 시안 스튜어트는 기묘한 다정을 느꼈다. 인간의 방식으로는 작용하지 않는 다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그것은 분명히 다정이다.
까닭은 내가 위로받아서.
그는 남자의 손이 그의 손을 뒤덮은 광경에 의식을 집중했다. 얼마간 한눈을 팔아도 빗자루는 흔들리는 일 없이-비유적인 표현으로, 실제로는 시안 스튜어트가 서툰 탓에 다소간 초보 마녀의 외유처럼 되었다-나아갔다. 차가운 손은 이럴 때에 차라리 도움이 된다. 손톱 끝에서부터 기어오르는 한기가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어떠한 존재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혀가 떨어져도 말할 수 없지만, 시안 스튜어트는 남자에게 보호받는다는 기분이 들어, 안심했다.
그러나 그는 솔직해지는 대신 다른 방식을 택했다. 자존심이란 때로 특이한 방식으로 발현하기 마련이며 시안 스튜어트의 경우 그것은 화제를 돌리는 측면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사람의 사회에서 살아가던 시절 배운 버릇이기도 하다. 안심하는 마음과 같은 장소에 그런 마음이 실재한다.
“밤눈이 밝네.”
“아가씨도 곧 트일걸.”
남자가 그의 등을 쿡 찔렀다.
“여기 점이 있는 것도 보여, 나한테는.”
“그것까지는 안 물어봤어.”
“차갑게 굴긴.”
작은 웃음이 처음으로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도 웃긴 웃네.”
“그럼 웃지?”
“그거 말고, 소리 내서 웃은 건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그랬나? 웃을 일이 없었나 보네.”
“그럼 방금은 왜 웃은 거야?”
“그러게?”
“그렇게 의뭉스럽게 말하면 좋아?”
“응, 아가씨가 지금 꽤 얄밉다고 생각하는 걸 알겠거든.”
“….”
침묵은 허공을 깊게 만든다.
“속을 읽혔다고 생각했지?”
별과 별 사이는 아득하게 멀어 보이고, 홀로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침묵은 그래서 종종 위압이 된다.
그러나 남자와의 문답은 모든 간극을 줄이듯 시야를 밝혔다. 시안 스튜어트의 얼굴을 보지 못할 남자가 뒤에서 이야기했다.
“그래도 아가씨는 제법 강단이 있어. 도전하는 걸 원래 좋아해?”
아마도. 아니, 확실하게. 시안 스튜어트는 생각했다. 난 지는 게 싫어. 그래서 당신에게 나를 내주었던 것이고, 복수에 모든 걸 바치듯 했던 것이고, 당신을 보면서 안심하면서도 내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 그건 내 단점이야. 그런데….
“좋아해.”
당신은 그걸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한동안은 이 도전정신을 간직한 채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건 당신이 스스로 불러온 결말이니까, 당신만은 그걸 이해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바람이 시안 스튜어트의 뺨을 세차게 치고 지나갔다. 대단히 싸늘한 바람이었지만, 춥지는 않다. 발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차고 올라왔다. 남자가 준 신발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 그렇지만, 너무 더럽다. 그는 발을 털어내 신발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왜, 신발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나?”
“더러운 걸 밟았는데 버리고 가는 걸 깜빡했어.”
“저런…마법이 걸린 신발이니, 주운 사람은 횡재하겠네.”
“문제가 돼?”
다시 한번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아가씨의 행동을 막을 순 없으니까.”
그러더니 잊었었다는 듯 덧붙였다.
“아, 물론 난 빼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는 남자가 아주 밉지만은 않다. 이상한 노릇이지. 체념일까? 아니면, 아니면…. 그는 달빛이 희끄무레하게 꼭지를 밝힌 거대한 삼나무 위에서 잠시 내렸다.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눈이 뜨인다는 것이 이런 감각이라면 그도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는 남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갑자기 왜 멈췄어?”
맨발로 나무 꼭지를 밟자, 간질간질한 감각이 발가락을 파고들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이런 식으로 달과 별을 샹들리에로 두고 나무 위에서 중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 또 누가 있어, 이런 곳에 서더라도 내 손을 잡아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해줄까? 당신은 당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는 걸까?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 배신당했는데,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되어 버린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
그럴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자의 사람인 시안 스튜어트는 별과 달을 증인 삼아 후자의 사람인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어떻게 돼?”
당신 이름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인사라는 것은 처음 만난 사이에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복수를 완수했으니 괴로움과 슬픔을 다소간 잊어도 좋았다. 죽은 이들의 손가락이 나의 목을 틀어쥐었던 힘을 풀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점유하던 가장 큰 부분을 잃는다.
과거를 버린 이들은 언제고 새로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제부터의 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과 나는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처음 만난 셈이 된다.
“카즈야.”
내가 처음 만난 당신이 말했다. 그렇게 대꾸하는 얼굴은 묘하게 부드럽다. 서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을 보이는 기분이 제법 낯설었다. 뱃속이 울렁거린다. 당신은 이 감각이 뭔지 알고 있을까? 아주 오래 살아서 아는 것이 많으니까. 설명해줄 수 있어?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묻기 전에 시안 스튜어트는 그의 주인이자, 동지이자, 신이자, 이제 앞으로 길고 외로운 시간을 영원히 함께 걸어가야 할 사람에게 인사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조금의 거리낌도 느낄 수 없었다. 두려움은 분명히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으되 그것은 절대로 그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남자가 그에게 그런 기회와 방식을 제공했다. 무상으로.
“만나서 반가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대답은 적당히 단호했다.
“글쎄…재미있는 아가씨일까?”
카즈야가 허공에 발을 내디뎠다. 두 개의 아몬드가 마치 허공에 던져진 사탕처럼 둥글게 흔들렸다. 당신도 지금 새로 태어난 것 같나?
“시안 스튜어트.”
“응?”
“시안이라거나, 스튜어트라거나, 아니라면 시안 스튜어트라고 불러.”
“갑자기? 여태까지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이제까지는 시안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고, 스튜어트라고 불릴 자격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런데.
이제 나는 온전한 사람이 됐다. 모든 것을 끝마쳤으니 성을 자칭할 자격을 갖추었고, 과거를 내려놓았으니 시안이라고 불릴 때의 작은 기쁨을 손에 넣어도 좋았다. 인생을 살아가며 느끼는 소소하고 애틋한 기쁨을 외면하거나 저주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내 인생은 이제 당신하고 밖에 이어질 수 없으니까.
“어차피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이제 없으니까, 카즈야가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으면 안 돼.”
“그렇다면, 시안.”
카즈야가 시안 스튜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가볍게 잡아, 마치 언젠가 낮에 했던 것처럼 함께 쥐었다.
“또 춤이라도 출까?”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우리는 춤추기 시작한다. 아주 오래도록 영원히, “당연히 원하지.” “왜?” 질문과 질문을 이으면서.
“이제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갈 사람은 카즈야 뿐이니까.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할 거야.”
“하하! 진짜 재밌게 말하는 아가씨, 아니지…시안은 참 재밌게 말하는 아가씨야.”
우리는 아득하게만 느껴질 영원을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서로가 가진 것이 서로뿐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허례도 허식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남자와 함께 있으면 언젠가는 약점조차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었다.
꿈은 바람에서 기반하고 바람은 행위에 영향을 주며 행위는 관계를 바꾼다. 그렇다면 이 꿈은 당신과 나를 얼마나 바꾸어갈까. 나는 당신과 바뀌고 싶은가? 복수를 마친 이답지 못한 사사로운 상념이 시안 스튜어트의 머리를 바람보다 더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마치 자신이 아주 어린 소녀라도 된 듯했다.
온전한 진심만을 주고받으며 복수도 공포도 잊어도 좋은 춤을 출 상대란 얼마나 만나기 어려운 일인가.
“아….”
“뭔데?”
남자가 우아하게 발을 내디뎠다. 처음엔 어설프던 몇몇 동작은 인제 와서는 완벽해졌다. 시안 스튜어트는 자신이 그 점에서는 대단한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즈야 당신은 행운아야.”
우리는 행운아야.
“갑자기 왜?”
복수를 끝내고야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법이므로 그는 만족스러웠다.
“최악의 미감과 어설프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도 나 같은 아가씨와 춤출 수 있잖아.”
“와, 자신감이 대단한데?”
“그러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하지만 나는 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싫어.”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난 아주 오래 살 거니까, 살다 보면 카즈야 당신조차도 날 막을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산다고 말하네.”
말이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카즈야의 눈이 고요했다. 그러자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주 예전, 이와 비슷한 순간에 있었던 일로, 시안 스튜어트는 카즈야가 은근히 이 사실을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 이제 거울에 비칠까?”
“보고 싶어?”
대답은 카즈야의 것보다 더 잔잔하게 울렸다. 그러나 두 사람이 듣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목소리다.
카즈야가 웃었다. 시안 스튜어트도 마주 웃었다.
달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고요한 밤에 두 사람은 만났다.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어떤 신화에도 없는 방식으로 시안 스튜어트는 신에게 목덜미를 내밀었다. 그러자 신이 기꺼이 피를 취했다. 그런 식으로 신화가 시작되는 법일지도 모른다. 시안 스튜어트는 생각했다.
上 : 청년과 아가씨
中 : 어떤 현상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