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球少年とラベンダー少女の恋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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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월상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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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이미지와 텍스트 전부 있으니 편하신 방법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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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아!”

  “숲에 익숙하지 않은 여자다, 놓치지 마라!”

 

  시안은 나뭇가지를 밟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뛰었다. 부드러운 재질의 치맛자락은 무도회장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숲을 건너기에 적합한 복장은 아니었다. 하기야 이 숲 자체가 시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 갑자기 던져진 이물질이었다. 몇 명의 직공이 매달려 수놓은 자수가 반짝이는 치맛자락, 목을 서늘하게 장식하는 은과 금의 목걸이, 귀를 잡아 뜯을 듯 무거운 귀걸이…그는 마치 잘못된 무도회장에 초대받은 손님 같았다.
  걸을 때마다 작은 돌조각이 발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원래는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어울리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구두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시안은 나뭇가지를 잘못 밟아 발목을 접질릴 뻔한 뒤, 가지고 있던 공단 구두를 바로 강물에 던져 버렸다. 판다면 금화 스무 닢 정도는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쉽지는 않았다. 지금 시안이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은 목숨 줄이었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서도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감상이야 얼마나 푼돈이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얇고 하늘하늘한 옷감이 그의 다리를 끈적이듯 감쌌다. 시안은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꼈다. 오밀조밀하고 작은 것들을 아끼던 날이 시안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빠르게 투항한다면 고통 없이 끝내겠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시안이 걸을 때마다 멀어졌다. 횃불이 숲을 스치는 소리가 지척까지 난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면, 다행스럽게도 아직 불빛은 멀었다. 그러나 바람이 스치는 것이 꼭 누군가의 눈길 같아 몸을 떠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바람이 한 차례 더 세차게 불자 겁에 질린 팔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시안은 팔을 꼭 끌어안았다. 급하게 눌러 쓴 로브 사이로 금빛이 빛났다. 그는 천을 비집고 나온 머리카락을 다시 안으로 밀어 넣음과 동시에 울음도 삼켰다. 시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차라리 검은색이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생각되었다.
  숲은 밤보다 더 까만색이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카락은 표적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금발의 여자다, 찾아!”

 

  시간이 얼마 없었다. 따라서 고민 역시 자연스레 짧아졌다. 시안은 허리춤에 맨 작은 단검을 손에 쥐었다. 단검 역시도 이 숲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시안의 열다섯 번째 선물로 부모님이 주신 것으로, 황가에 검을 헌상하는 대장장이에게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를 지불하고 얻어낸 작은 지보였다.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은 이 작은 단검에 들일 금화를 차라리 제대로 된 검을 사는 데에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휘황하고 아름다운 단검이었다.
  그 단검이 시안의 손에서 은빛으로 반짝였다. 이 숲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는데, 이 숲이야말로 낮도 밤도 모두 어두워 근방 주민들은 물론이요 면한 영지의 영주마저도 피하는 곳이었던 까닭이다. 혹자는 이 숲 깊은 곳에 피를 빠는 흡혈귀가 영원을 헤아리며 잠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오늘 이 숲이 이토록 소란스러운 것은 전적으로 시안 자신의 덕택이거나 혹은 책임이었다. 습하고 눅눅한 공기에 불티 냄새가 실려 왔고, 사람이 드나드는 일 없던 땅이 마구잡이로 짓밟혔다.

 

  “사특한 마녀다! 절대 놓치지 마라!”


  숲이 밝아지는 순간은 몹시도 빨리 왔다. 그러니 시안에게는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쥐고 서글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것은 이곳에 모두 내버리고 갈 각오로 손을 들었다. 왼손에 쥐어졌던 밀빛 머리카락 한 타래가 바닥에 힘을 잃고 떨어졌고, 그 위를 먼지와 진흙, 나뭇가지가 엉킨 긴 치맛자락이 따랐다. 시안은 그 천을 어설피 갈라 발에 묶었다. 열여섯 생일 선물로 받은 목걸이, 열여덟 생일로 받은 귀걸이, 올해 생일, 가장 마지막으로 받은 열아홉의 머리 장식이 그가 버린 추억에 잇따랐다.
  누구나 그렇듯 시안은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소녀 특유의 낙천적인 마음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시안은 금지옥엽으로 자라났고,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몹시도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뿐인 딸을 황태자의 약혼녀로 만들어줄 정도였으니 그 애정이 어느 정도로 두터웠는지 알 만했다.
  하여 시안의 미래는 두려움이 낳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영광과 영달이 시안에게 예정되어 있었으며, 시안 자신도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살았다.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것이 시안 자신보다 어울릴 사람이 없었다.
  그는 역사, 수학, 다양한 국가의 언어, 천문, 수사학을 아우르는 재지의 소유자였다. 예술을 보는 안목 역시 뛰어났으며 붓을 쥐는 손이 조금 서툰 것은 오히려 그의 몇 안 되는 인간적인 매력으로 꼽힐 정도였다. 시안은 누가 보기에도 흠집 난 적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니 삶이 어그러질 종적은 시안의 시야에 잡힌 적이 없었고 또 잡힐 이유도 없었다.
  하루하루는 밝고 섬세하며 아름다운 것들을 찬미하기에도-그것이 다소 지루한 일상이라고 하더라도, 시안은 그 사이에서 즐길 만한 혹은 기뻐할 만한 거리를 얼마든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짧은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이 어두운 숲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시안은 자신이 뒤로 해야 하는 것들을 놓아두고, 열다섯 생일에 받은 단검 하나만을-그것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예술품이어서는 아니었고, 단검이 가진 살상이라는 측면에 집중한 결과였다-들고 뛰었다. 뒤에서는 황가의 추적자가 쫓아오고 있었으므로 그는 더 깊은 숲으로 나아가야 했다. 추적술을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흔적을 지우는 일보다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쪽에 더 집중했다.
  마녀라는 말을 들으며 쫓길 줄 알았더라면, 그는 열아홉 생일 선물로 교수자를 불렀을 것이다. 추적자들은 이 어두운 숲에 잠시 발목을 잡혔을 뿐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씌워진 누명은 그런 인원을 대동하기에 충분했다. 반역자. 시안은 잊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던져진 올가미를 다시 한번 뇌까렸다.
  그는 어떤 무뢰배가 그에게 그런 죄를 짊어지게 만든 것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현상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 어떠한 예고도 없이 화려하던 정원이 불탔고, 저택이 무너졌으며, 아버지가 저택 앞에 나서 객을 맞다 눈먼 칼에 맞아 쓰러졌다. 어머니는 특유의 민첩함으로 시안을 몇 명의 충실한 가솔들과 함께 내보냈으나, 마찬가지로 정원에서 옮겨붙은 화마 속에 남겨져야 했다. 남은 가솔들은 많지 않았으며 시안은 황도의 남쪽으로, 서쪽으로, 그리고 마침내 북쪽으로 도망쳤다.
  거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목숨이 계절을 잘못 알고 핀 꽃처럼 스러졌다. 몇은 배신했고, 또 몇은 투항했으며, 그 안에서도 가장 충실하고 고결한 이들이 시안을 살리며, 이 숲으로 밀어 넣으며 미래를 논했다. 대가는 그들의 목숨이었으므로 시안은 자신을 등 떠민 가솔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살아난다면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만, 난다면.
  흡혈귀가 살고 있다던 숲에 마지막으로 시안을 숨긴 이는 여기서 동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자신이 잡힌다고 해도 얼마간의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는 것이 가솔의 계산이었고, 실제로 그 계산은 얼마간 맞았다. 단 하나 계산되지 못한 것은 시안의 무력함이었다. 시안의 흔적은 놀랍도록 알아보기 쉬웠다. 추적자들은 곧 도망쳐버린 가솔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시안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몸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그는 숲 안쪽으로 혹은 그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몰려났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거리가 이토록 가깝게 맞닿아버렸다.
  생존에 필요한 것을 익힐 기회가 없었음이 이토록 통탄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고 그는 가진 것만으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가솔도, 부귀도 영화도 없다. 다만 손에 든 한 자루의 검만이 시안이 시안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허파가 쥐어짜일 때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발이 뭉개져도 상관없었다. 목숨을 구명할 수만 있다면…그리하여 이 목숨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지불한 거대한 대가를 돌려줄 수만 있다면, 시안은 뭐든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 스스로는 추적자 한 사람의 숨통을 끊는 일조차 어려웠다. 찻잔과 피아노, 양장된 서적 따위를 뒤적이던 손이 활과 검 혹은 해머 따위에 익숙한 손과 대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 수가 이토록 많아서야 댈 것도 없다. 그는 도망자일지언정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시안은 숲 가장 깊은 곳으로,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가진 유일한 희망은-지금의 시안은 그것을 희망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이 숲에 얽힌 전설이다.
  숲 끝에는 오래된 세월을 헤아리는 흡혈귀가 산다. 그는 수상한 자들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으며, 피와 죽음을 대가로 그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 준다. 남은 희망은 그토록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죽어간 이들의 피와 목소리가 그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절규와 악의, 절망, 비참함, 시안이 열아홉 평생을 가질 필요라고는 없이 살아왔던 것들이 지금 그를 지탱하는 가장 열렬한 양식이었다.
  그는 감정을 불태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모든 것이 격리되고 또 나뉘었다. 가장 먼저 나뉜 것은 공간이었고 그다음으로 나뉜 것은 바람이었으며 마침내에는 시안조차 모든 소리가 멀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한때, 그는 황태자를 앞에 두고도 긴장할 필요가 없었던 하프시코드 주자였기도 했으므로, 그 판단은 틀릴 리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공간은 누구의 침범도-어째서 시안 자신만의 침입은 허용했는지 모를 일이었다-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사회의 섭리는 이 공간을 넘을 수 없었고 태양과 달마저 이곳에는 빛을 뿌릴 수 없었다. 그 고독한 공간에서 시안은 놀랍도록 안도했다.
  이곳에는 더 이상 그를 위협하는 것이 없었다.
  안도와 함께 고개를 들자, 어슴푸레한 형체가 시안의 시야를 뒤덮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는 그것이 아주 어둡고 깊은 것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지만, 그 형체가 그가 살아온 세상과는 완전히 유리된 것이라는 것, 그 속에 감히 사람의 힘으로 재단할 수 없는 심원함이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이것을 엿본 이들이 숲 바깥에 소문을 퍼트렸으리라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긴장이 다시 오슬오슬 소름을 돋웠다.


  “여긴 아가씨가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데 말이지.”

 

  시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의 청년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하얀 피부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고, 옷자락은 시안의 것과 달리 단정했다. 그러나 시안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청년의 생김이나 그가 견지하는 평온한 태도가 아니었다. 청년의 두 눈이 무섭도록 밝았다. 이곳에는 별도 달도 태양도 없는데, 시안은 그가 선 이 숲 모두가 이 청년을 숭배한다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사지에 몰린 짐승의 예감과도 닮은 것이었다.
  청년이 시안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 숲에는 방문객이 잘 찾아오지 않는데, 어쩐 일이야?”

 

  그제야 시안은 자신이 마치 목소리까지 빼앗겨버린 것처럼 먹먹하게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깥, 에서…도망쳐 왔어.”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태워 대답했다. 그러지 않고는 딱딱 부딪히는 이를 멈추기 힘들었던 까닭이다. 청년의 눈이 부드럽게-그것을 부드럽다고 해도 좋을지 시안은 알 수 없었다-휘었다.

 

  “아…. 무엇으로부터?”


  느긋한 목소리가 시안에게 물었다. 그건 시안이 이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저택을 나온 순간부터, 갑자기 반역자라는 누명을 짊어지고 기묘한 공간으로의 망명을 선택하게 된 순간부터…계속해서 안고 있던 의문이었다. 도대체 누구로부터 그는 도망치고 또 누가 그를 이런 꼴로 만들었지? 그리고 누가 시안에게서 시안이 사랑하는 것들을 앗아갔을까?
  그는 무지를 솔직하게 밝혔다.

 

  “죽음으로부터.”

 

  다소 고집 센 목소리가-그러나 시안이 겁에 질렸음을 그도 청년도 알았다-숲을 또렷하게 울렸다.

 

  “그건 모두가 도망치는 것이잖아?”

  “내가 도망치는 건 특별해.”

  “그래? 어떤 식으로?”

 

  청년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서두름을 몰랐다. 시안은 그런 목소리를 알았다. 이 청년은 모든 것을 잃기 전의 시안 자신과 닮았다. 삶은 권태롭고 무력하며, 그 사이에서 흥미로운 몇 가지를 건져내지 않는 한, 이어갈 이유가 많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런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는 법이었다.


  “나를 물어.”


  시안은 대부분의 일에 무던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던할 만큼 망가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 숲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 충성으로 시안 한 사람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시안의 정적이 그들에게 더러운 올가미를 씌우며 명예와 목숨을 난도질하는 동안에도 어떤 이들의 마음은 결코 바라는 일 없이 시안에게 머물렀다. 아니었더라면, 시안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시안에게는 그에 응할 의무가 있었다. 자신의 선 안에 든 사람에게 시안은 그토록 충실했다.


  “너를 물어?”

 “그래.”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잖아?”

  “알아.”

 

  시안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숲에 사는 흡혈귀는 빛이 없는 곳도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고, 청년은 정확하게 그것에 부합하는 용모와 태도를 지녔다. 무엇보다도 시안의 몸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청년을 앞에 두고 쇠약해져 가는 것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야.”

  “아는데도?”

  “아는데도.”


  청년이 웃었다.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서글서글하지도 않은, 두 눈이 유리알을 넘어 시안을 똑바로 향했다.

 

  “당돌하네.”

  “날, 물어.”

 

  시안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로브를 벗고, 엉성하게 잘린 머리카락에 감사하며 목덜미를 내밀었다.

 

  “마침 숲에 들어오면서 머리카락을 잘랐거든.”

  “적극적인 아가씨라니까.”

 

  엷은 웃음이 흘렀다. 청년은 잠시 시안을 바라봤다. 그는 손끝이 곱아드는 듯한 절망, 어둠에 삼켜질 것만 같은 두려움, 사그라드는 용기를 모두 태워 하나의 열망으로 빚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했다.

 

  “물지 않으면 찌를 거야.”

  “나를?”

  “나를.”

  “특이하네.”

  “만찬을 차려주면, 당신은 나를 먹어야 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보다 맛있는 피를 가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으로 시안은 속삭였다. 청년이 잠시 시안을 바라보더니, 그의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놓치면 후회할 거야.”
  “그러려나?”

 

  곧, 차갑고 냉정한 입술이 시안의 목에 닿았다. 누구에게도 내어준 적 없는 하얀 덜미로 시안은 끔찍할 정도로 뜨거운 통증을 느꼈다. 목을 긁고 싶은 충동, 비명을 지르고 싶은 열망, 그것들이 시안의 손아귀로 빠져나가, 청년의 옷깃을 뒤틀었다. 청년의 손이 곧 힘준 그의 손을 쥐고 주먹을 폈다.


  “정말 꽤 맛있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또 놓친 것 같기도 했다. 피를 빨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혈관 하나하나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감각은 혼란스러웠고, 우악스럽게 뜯기기보다는 우아하게 시안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듯한 기묘한 감촉 역시도 낯설었다.

 

  “으….”

  “다 먹지는 않을게. 하지만, 권해줬으니 더 먹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건 알아달라니까?”

 

  청년의 손이 시안의 허리를 쥐었다. 콧날이 시안의 목덜미를 꾹 눌렀고, 차갑기만 한 호흡이 통증 사이를 가로질렀다. 무엇인가 아주 깊은 곳까지 청년에게 내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시안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불살라서라도 이뤄야 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자 그는 어느 순간 통증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숲은 놀랍도록 생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고, 어둠은 더 이상 심원하지 않았다. 이곳에도 나름의 법칙과 빛이 있었다.
  이내 눈물이 났다. 이제 시안은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시안은 귓불에 닿는 숨결에 온기가 깃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사람 아닌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상태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몰랐지만, 변해버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이제 사람보다는 이 청년에게 더 가까운 존재였다. 갈색 머리의 청년이 장난스럽게-그 모습은 꼭 보통의 청년 같아서, 시안은 아주 많이 울고 싶어졌다-그들의 등 뒤에 선 성벽을 가리켰다. 시안은 이제 그것이 성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이지를 넘은 힘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모든 것의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모르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해, 아가씨.”


  어둠 속에 빛이 깃들었다. 시안은 정신을 잃기 전, 이를 악물고 물었다.

 

  “당신, 이름은 뭐야?”

 

  청년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 대답해 주었다.

 

  “카즈야.”

 

  시안의 치맛자락을 본 청년이 대꾸했다.

 

  “너와 같은 아가씨들은 성씨 같은 것도 따지겠지만, 아쉽게도 내 성은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러니 카즈야로 부르도록 해.”

  “카즈야.”

 

  시안은 그 이름을 되새겼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종말이 아닐 것이며, 오히려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시야가 곧 어둑하게 감겨왔으므로 그 의지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멀리서 네 이름은 무엇이냐는, 아주 조금의 흥미를 담은 목소리가 그를 뒤따랐다. 시안은 대단히 졸렸으므로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어차피 그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든 존재였고, 그런 이들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 남아있다. 그러니 지금 한순간 이 목소리를 외면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
  시안은 살아남은 이 특유의 낙천성을 발휘했다. 깨어나면, 카즈야라는 저 흡혈귀에게 말해주어야지. 그의 이름은 스튜어트 시안이었지만,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지는 스튜어트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면 자신은 너와는 다르게 스튜어트라는 성을 사용할 거라고. 일어나면 꼭 그렇게 해야지.
  눈 감은 동안, 그는 아몬드가 나오는 꿈을 꿨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설치된 가제보 아래, 시안과 잘 모르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예쁜 유리그릇에 아망 드 쇼콜라가 담겨 있었다. 시안은 그것을 일부러 까득 소리를 내 씹었다.

 

  “날 씹어먹고 싶은 거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시안에게 물었고, 시안은 대답하는 대신 아망 드 쇼콜라를 입에 넣었다. 다소 기묘하고 또 대중없는 꿈이었다. 그러나 대단히 행복한 꿈이었으므로 시안은 안심하고 깊게 잠들었다. 일어나, 세상이 바뀌기 전까지. 그는 오래 잠들었다.

 

 


中 : 어떤 현상을 이르는 말

下 : 신과 춤추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