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안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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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햇살이 만방을 총천연색으로 도색하고 있었다. 한봄에서 늦봄 사이에 위치한 제일로 고스란한 봄날이다. 모든 것이 생동하여 곱게 흐드러지는 계절에 접어들어 태양이 부쩍 따스해졌다. 희게 심지가 선 일광을 머리에 이고 나다니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살피면, 구태여 예외를 살피는 행위가 허튼짓이 될 정도로 모두의 얼굴이 울긋불긋 피어난 한창의 꽃처럼 해사하다. 얼마 전 온 봄비로 벚꽃은 모두 꽃비가 되어 바닥에만 하얀 유해로 남았지만, 그 바통을 이어받은 꽃들이 도처에 난만히 피어났다. 덕분에 교정에는 온통 꽃향기가 가득이다. 시험이 지나고 여러 학교 행사가 그 자리를 메우며 다들 한숨 돌리는 시기라, 아무래도 이때에 얼굴에 그늘 있는 아이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전 수업 내내 조용하던 학교는 점심시간을 맞아 부쩍 시끌벅적하다. 억지로 눌러 놓은 축하 폭죽이 때를 맞아 콘페티와 종이꽃을 곳곳에 마구 흩뿌리는 것만 같은 소란이다. 하지만 그 왁자함은 듣는 이를 불쾌하게 만드는 소음이라기보다는 청춘의 푸른빛으로 가득 찬 생음에 가깝기 때문에 어느 어른도 거기에 주제넘은 지적을 더하지 않았다. 선생들도 직원들도 지나가는 이들도 다만 아이들이 신이 났구나, 하고 흐뭇한 웃음과 함께 그들의 아우성을 마음으로 응원할 뿐이었다. 모두에게 축복받으며 약진하는 고등학생들의 삶, 그 한복판에 2학년에 재학중인 두 사람. 학생들 중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가장 반짝이며 두드러지는 부류에 속하는 둘, 미유키 카즈야와 스노하라 시안이 있었다.
바야흐로 소년과 소녀는 즐거이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한창 조잘거리는 데 열중하고 있는 시안의 도도록한 품에는 두터운 교과서와 지도서 몇 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미유키의 탄탄한 팔에는 목까지 차올라 흔들거리는 문제집 더미가 들려 걸음마다 조금씩 팔랑거리고 있었다. 꼭 커다란 나비나 새가 여럿 날개를 접고 그들의 가슴에 안겨 있는 모양새다.
가뭄의 단비 같은 점심시간, 식사를 만족스레 마치고 복도를 배회하던 둘은 선생님께 붙잡혀 심부름을 떠안고야 말았다. 정말 싫었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똑 부러지게 거절하고 빠져나왔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상대는 평소 두 사람을 귀여워하는 국어 선생님이었고 답례로 아이스크림을 약속했기에 소일로 나쁘지 않았다. 마침 일정이 없어 무료하게 거닐고 있던 두 사람은 제법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심부름거리는 혼자서 해결하기엔 주체스러웠으나 둘이서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햇빛이 부서졌다. 자료실에 묵직한 심부름 책들을 전부 전달한 후 밖으로 나와 돌아서는 발짝 발짝이 한없이 가뿐하다. 두 사람은 손을 털며 나무 그늘 밑으로 스며들었다. 시원한 차양을 제공하는 진녹빛 그림자 밑에서 아까와는 다른 이야기가 둘의 입시울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사와무라는 훈련에 아예 참여하지 못했지.”
미유키 카즈야가 이렇게 뇌까리며 여태 풀던 이야기보따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강인하게 자리를 차지한 온점에 시안은 곰곰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하순을 쭉 내밀었다가 금방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짧은 고찰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전부터 생각했지만 코치님 상당히 엄격하시네. 그렇지만 나는 그 결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아무튼 지각한 건 잘못이고, 그 잘못을 슬쩍 넘겨버리려고 한 건 더 큰 잘못이지. 너처럼 깔끔하게 인정하고 죄송하다고 했으면 혼나는 정도로 끝났을 텐데.”
시안이 똑 부러지게 말을 이어나갔다. 미유키와 친분이 있다고 억지로 편을 들지도, 그렇다고 좋아하는 친구를 향해 지나치게 냉혹한 잣대를 들이댄 것도 아닌 답이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 위에서 중용의 질서를 그렸다. 스노하라 시안은 언제나 그런 애였다. 틀린 말을 하지 않는 아이. 자기 생각을 똑똑하되 반듯하게 혀로 발음하는 여자애. 아주 객관적이고 말씨가 녹녹하지 않아 혹자는 그녀가 냉랭하다느니, 무정하다느니 뒷말로 흉보는 데 열을 올리지만 미유키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다. 도리어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도 미유키가 훈련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하루라도 빠지게 됐으면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았을 테니까. 그치?”
그리고 이따금 이렇게 보이는 다정은 그를 봄바람 속 흩날리는 벚꽃 이파리처럼 영글게 하곤 했다. 다부진 체격에 항상 야구만 좇아 뛰어다니느라 살갗이 그을은 운동 바보 남자애의 마음을, 시안은 단정한 말씨 하나, 작은 미소 하나로 다섯 갈래 갈라진 연분홍 꽃으로 만들었다. 꽃잎이 웃음소리처럼 와르르 무너진 자리에는 초록빛 새잎이 돋아 파릇파릇한 색채를 뽐내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에는 고작 자그마한 희소가 아니다. 스노하라 시안이 말을 맺으며 낯을 온전히 깨뜨려 웃었다. 그야말로 파안破顔이었다. 섬세한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릴 듯 사붓하게 올리면서, 속눈썹 짙게 드리운 눈이 섬월처럼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태양 아래서 흡사 금가루를 부수어 놓은 듯 아름다운 황금 빛깔로 반짝거렸다. 한여름에 피는 라벤더를 닮은 눈은 때 이른 절정에 이르며 절경을 이룬다. 아직 봄이라 성기게 차오른 나뭇잎 사이 기어든 햇살이 볕뉘가 되어 내리쬐면 그녀의 눈망울은 얇게 닫힌 눈꺼풀 속에서도 자색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볼이 곱게 상기된 채로,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미풍이 기분 좋게 불어 두 사람의 머리칼을 흩어놓았다. 조금 접혔다 돌아온 구김살 없는 파란 리본이 그녀의 쇄골 위에 앉아 행복을 준다는 소설 속 파랑새처럼 그를 향해 손짓했다. 영원 같은 찰나에, 모든 것이 완벽하기만 했다.
미유키 카즈야는 잠시 숨이 멎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짙게 물이 오른 살갗의 결을 따라 붉은 노을 같은 것이 두 뺨도, 눈가도, 귓가도 온통 발그레하게 물들이는 것을 그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그의 심장에서 축포처럼 꽃잎이 휘날렸다. 사랑에 빠지기에 딱 좋은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