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안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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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히 뜬 밤이었다. 밤하늘이 개었고 바다는 잔잔했다. 둥그런 은반 같은 달은 바다 쪽으로 기울어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구름이 종종 얇게 짜인 시폰 커튼처럼 드리우며 월광을 가렸다 풀어 놓았다를 반복했다.
십이월의 바닷가는 서늘했다. 해풍은 눈 냄새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스노하라 시안은 철썩이는 파성을 들으며 수면에 일렁이는 윤슬을 바라보았다. 달빛 별빛 머금어 희게 부서지는 물결은 꼭 값진 보석을 조각내 흩뿌려 놓은 것처럼 보였다. 절경이었다. 이렇게 한갓진 마음을 가지고 바닷가를 걸어본 게 얼마만이던가. 아름다울지언정 홀로 산책했더라면 금방 싫증이 났을지도 모를 정경이 내내 고와 보이는 것은 그녀의 곁에 미유키가 머무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아주는 포수인 그가 야구계에 이름을 알리고 자리를 잡기까지 함께해온 시안은 그의 커리어를 전적으로 응원해 왔다. 사랑은 소중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사랑이 인생의 버팀목이 되기는커녕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애정이라는 명분을 미명으로 갖다 붙이며 상대의 앞길을 막는 어리석은 치들을 시안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모델 일을 할 때 제일로 반짝이는 것처럼 그는 야구를 할 때 가장 빛이 났다. 끼리끼리 만났으므로 둘은 그걸 잘 알았다. 바쁘게 몰아치는 일정들 속에서 서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없이 귀하고 즐거운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
미유키의 겨울 휴가로 떠나게 된 간만의 여행이었다. 시안은 낮에 다니며 구경한 명소들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 지었다. 이어지는 시즌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이 여행을 효율적으로 계획하는 데 시간을 오래 투자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미소와 함께 그녀의 입가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코와 뺨을 붉게 에이게 하는 바닷바람 때문인지 거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많은 이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업을 가진 그녀는,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유로움을 즐길 줄 아는 여자였다. 미유키와 겹쳐 잡은 손에서 온기가 옮아 왔다. 포근한 분홍색 아우터에 파묻혀 그녀가 다시 웃었다.
함께하는 시간을 느긋하고 오롯하게 만끽하고 있는 그녀와 달리 미유키 카즈야의 속은 벌집마냥 시끄럽기 그지없다. 그는 지금 전례 없이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편안하고자 떠나온 여행에서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곤두선 이유는,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여행을 계획한 근원에 있다.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미유키는 지금 자신과 나란히 해안선을 따라 걷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시안이 언젠가 겨울 바다를 보고 싶다고 스쳐가듯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치밀하게 짜온 플랜이 빛을 발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 보이는 그의 상태를 보면 과연?
이야기는 아직 시베리아 기단이 일본에 완전히 다다르지 못해 볕이 좋으면 제법 따스했을 계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러포즈를 생각해온 지는 그럭저럭 오래되었다. 한창 자라던 학창 시절에 만난 첫사랑인 그 애는 어느새 곁에 있지 않으면 어색할 지경의 마지막 사랑이 되었다. 그들은 둘 다 자기 분야에 유능한 인재들이었으며 자신의 꿈과 직업에 대한 소신이 뚜렷하였기에 다른 연인들이 으레 그러듯 서로의 일부를 포기하며 언제고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소홀함에 대한 이해. 그런 점이 오히려 예쁘게 엮인 퍼즐 조각처럼 기막히게 잘 맞아 그들의 연애를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시안이 없을 때에도 그는 부지런히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지만, 그녀가 있기에 그렇게 잘 가꾼 삶이 완전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입을 맞추거나 투박한 진심을 건네면 서리꽃처럼 도도하던 낯이 녹아 봄 햇살처럼 눈부시게 흐무러지던 그녀의 얼굴을 그는 판화를 새긴 것처럼 또렷하게 기억한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그 웃음을 자신의 인생 설계에 실증된 한 조각으로 편입하고 싶다는 바람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대도, 분명 한 톨 꽃씨로부터 시작되었을 동반에 대한 욕망은 점차 커다란 꽃봉오리로 영글어 갔다. 그는 자신이 본래부터 해야 할 과업을 수행하듯 프러포즈를 염두에 두었다. 다만 상술했듯 야구에만 골몰해왔던 미유키 카즈야에게 스노하라 시안은 마지막 사랑이기에 앞서 ‘첫사랑’이었으므로, 그는 서툰 만듦새의 낭만을 들고 어떻게 해야 이 벅차는 마음을 멋들어지게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하게 되었다.
“선배 그거 진심임까?”
“햐하하— 미유키 이 자식, 골 때리네.”
어렵게 구상한 공개 고백 시나리오를 사와무라와 쿠라모치에게 어거지로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이 딱 이랬다. 사와무라 에이준이 평소에 과장하는 습관이 있다고는 하나, 저만치 기겁하는 표정은 누가 봐도 꾸며낸 얼굴이 아니었다. 쿠라모치 요이치는 후배보다는 좀 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자신을 놀릴 의지가 만만한 낯짝을 불퉁스럽게 노려다보며 미유키 카즈야가 일갈했다.
“야, 야. 웃지 마.”
“하지만 조금만 더 차분하게 생각해보라고. 그 애 말야, 공개 프러포즈 받으면 분명 도망칠 걸? 한 번 뿐인 청혼이니 멋지게 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공개 프러포즈가 로맨틱하고 멋지다는 건 다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니까? 여자는 섬세하다고. 잘 생각해.”
“동의합니다. 과장은 덜어내고 좀 더 담백하게 해보시는 건 어떤가요? 예전에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다던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면 거기에서 단둘이 있을 때 반지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말임다.”
“야, 얘가 너보다 낫다.”
“그만 놀려라.”
스포츠드링크를 담은 물병이 그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 적시한 건데.”
쿠라모치 요이치가 유쾌한 눈빛을 하고 부러 건들거렸다. 미유키가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라모치, 그만 하라고 했다.”
“네, 네~! 무서워서 뭔 말 하겠나.”
“아무튼 공개 프러포즈는 아님다. 다시 생각해보십쇼.”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는 둘을 적당히 수습하며 사와무라가 일축했다. 훈련하는 선수들 틈새로 배트가 볼을 경쾌하게 치는 소리가 났다. 휴식을 마치고 그라운드 쪽으로 향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유키 카즈야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실지로 제 앞에서만큼은 친화력 좋은 강아지처럼 다정히 군대도 시안은 본래 낯을 많이 가렸다. 그 얼굴에 부정적인 감정이 끼어드는 꼴을 볼 순 없다. 공개 프러포즈를 계획 리스트에서 지우며 그가 엉덩이를 털고 느리게 일어섰다. 유독 태양이 작열하는 날이었다.
화사한 햇님을 보며 그는 속절없이 스노하라 시안을 떠올렸다. 그녀의 웃음이 유독 보고 싶었다. 찰나에 그는 사와무라가 직전에 건넸던 제안과 겨울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시안의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를 동시에 떠올렸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그렇게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미유키가 여행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공들여 짠 계획은 꽤 번듯하고 그럴듯했다. 하지만 계획이란 것이 다 그렇듯이, 이론적으로 작전을 짜는 것과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함께하는 휴가 내도록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근사하게 건네고 싶은 말들은 반복해서 정리해도 머릿속에서 꼬였다. 입 밖으로 내어놓으면 얼마나 볼품없어 보일는지! 무심코 깍지 껴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미유키를 시안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호텔 가서 쉴래?”
애정을 담아 응시하는 라벤더 빛깔 눈이 만개한 꽃잎처럼 고왔다. 미유키는 그녀의 눈에 눈부처로 맺힌 자신을 마주했다. 허둥지둥하는 제 모습이 겸연쩍어 그는 저도 모르게 귀를 조금 붉혔다. 이 와중에도 시안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녀에게 결혼을 청할 시간이 임박해 왔다.
“아, 아니.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 물론 너랑 같이 산책하는 건 좋긴 한데. 몸 상태가 안 좋지는 않다는 얘기야.”
“네가 그렇다면 알겠긴 한데…….”
시안의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그녀의 영민한 머리가 미유키가 현업 일정이 끝난 직후 쉬지도 못하고 여행을 위해 날아왔음을 떠올렸고, 이를 그의 기묘한 상태와 연결지었던 것이다. 제대로 못 쉬어서 피곤한가 보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낸 그녀가 다시금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역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여행 날짜를 촉박하게 잡았잖아. 아무래도 피곤해 보여서~”
“그게…….”
해맑고 상냥한 오해를 받으며 미유키는 영 난처해졌다. 이대로 못 이겨 호텔로 돌아간다면 야심차게 세워 놓은 계획이 통째로 틀어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뜸을 들이자니 시안의 오해는 계속될 것이고……
그가 결정을 갈등하던 순간, 꼭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구름이 걷히며 파르라한 월백색 달빛이 그들의 시계를 사로잡았다. 미유키는 잠시 숨이 멎을 듯한 미시감과 함께 지금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바짝 긴장해 있는 등줄기와 별개로 그의 잘 생긴 입술이 의지를 다지며 강직하게 벌어졌다.
“저번에 내가 만든 특제 오므라이스, 맛있다고 했었지. 그것처럼 매번 네가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요리를 해 주고 싶어. 가정적인 모습이 좋다면 다른 가사 일도 더 열심히 할게. 뿐만이 아냐. 사람 때문이든 일 때문이든 네가 힘들어할 때 가장 먼저 안아줄 거고, 네가 하는 모든 일들을 응원할 거야.”
열린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는 말들은 누가 들어도 진심이었지만 제법 거칠었다. 열심히 준비했던 감동적인 멘트는 이미 미유키 카즈야의 머릿속 지우개가 다 지워 버린지 오래. 그는 분명 제 모습이 초라하고 우스울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백지가 된 남자의 뇌리에 표상처럼 드러나는 말들은 그 모양새는 못나도 열정과 진정성이 있었다.
9회말 투아웃 상황에서도 이것만큼 긴장 안 했을 거야. 그는 속말로 뇌까렸다. 시안은 아직 조금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내가, 그. 야구 하느라 평소엔 바쁘고 같이 있기도 힘들겠지만…… 휴가가 나오는 12월 한 달만큼은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시즌에는 잘 못 챙겨줘도 시간 날 때마다 너한테 집중할게.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가고,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게 해줄 테니까. 모든 게 좋아지도록 할 거야.”
음식 얘기를 두 번이나 하는 시점에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미유키의 귀가 다시금 조용하게 붉어졌다. 이제야 무를 수도 없고 무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마주하고 있는 시안의 눈에 스쳐가는 깨달음,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속눈썹과 하얀 입가에 피어오르는 부드러운 미소. 오랜만에 보는 그의 긴장하는 모습을 잔뜩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은 맑은 눈빛. 어떻게 답할지에 대한 미약한 고민과 기대감. 미유키가 조금은 어색하게, 그렇지만 강한 확신을 가지고 나열하는 말들 사이로 긴장한 그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변화들이 그곳에 존재했다. 은하수처럼 선명하게 수 놓여 자리하고 있었다.
“너랑 결혼하고 싶어……. 시안. 나랑 결혼해 줄래?”
한참 변죽을 올리다 요지가 이렇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말을 마무리한 그가 침 삼키는 소리가 시원스러운 파성 속에서도 민망할 정도로 또렷했다. 안경 너머로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모든 게 진실하고 서툴렀던 소년의 형태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구구절절 벌거벗은 속마음을 내어놓고 보니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물론이지. 당연히 좋아!”
시안의 답은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그제야 비로소 미유키는 파편처럼 흩어졌던 정신을 차리고 달빛이 쓸어내리고 있는 시안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녀는 행복하다는 듯이 낯을 깨뜨려 환하게 웃고 있었고,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네가 좋아. 너랑 꼭 결혼해야겠다. 이건, 완전, 완전, 해야 한다! 한 점 흔들림 없는 순애. 그 올곧은 담자색의 시선에 담긴 메시지가 너무나 명확해서 미유키는 그제야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경직된 입매가 바보같이 느슨해졌다. 시안이 야무지게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 안 끼워줄 거야? 준비했지?”
“어? 어. 잠시만.”
생각해 보니 반지도 안 꺼내고 이 난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까지 사고가 다다르자 미유키의 손이 분주해졌다. 그는 조금 허둥거리며 케이스를 꺼냈다. 그렇지만 기사처럼 무릎을 꿇는 자세만큼은 절도가 있었고 또한 다정했다. 그가 시안의 희고 가녀린 왼손을 굳은살 진 손바닥 위에 얹어놓았다. 맵시 좋게 뻗은 왼손 약지에 그가 고심 끝에 고른 반지가 원래부터 그곳이 제 자리였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고급스런 금테의 얇은 반지에는 심플한 큐빅 몇 알이 박혀 별사탕처럼 반짝였고 섬세한 세공 가운데에 꽃 장식이 작은 보석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미유키는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실천하기도 전에 시안이 냉큼 손을 빼 제 눈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녀가 나직한 소성을 흘렸다.
“네가 알 큰 거 불편해서 항상 심플한 반지 끼고 다니길래, 취향에 맞춰서 샀는데……. 프로포즈용이라고 하기에 너무 소박한가? 네가 원한다면,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큰 다이아 가운데에 박아줄게.”
미유키 카즈야는 본래 이렇게까지 부연을 길게 하는 부류가 아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시안이기에 그녀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귀여운 남자가 내가 평생 책임지며 의지하고 살 남편 될 사람이란다. 우아하게 곱슬진 밀색 단발이 경쾌하게 휘날렸다. 그녀는 그가 빨리 안도하여 마음 갈무리할 수 있도록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매끄러운 목소리가 청량한 바다, 그 위로 내리비치는 교교한 달빛과 닮아 있었다.
“됐어. 이게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매일 끼고 다녀야 할 반지가 그렇게 화려하면 불편하기만 하지. ……뭐, 사 주면 사양하진 않을게. 특별한 날 끼면 되니까?”
“네가 바란다면 몇 개든 사줄 수 있어.”
“그렇게까지 욕심낼 생각은 없고. 일어나, 무릎에 모래 묻겠다.”
미유키가 바지를 털며 백사장을 딛고 일어서자 시안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한번 꽉 끌어안았다. 새처럼 가붓한 여자의 품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났다. 평소보다 확연히 빠른 심박을 느끼며 비로소 남자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반려가 되기를 수락한 미래의 아내를 가장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은 몸과 몸이 틈 없이 맞붙었다.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벅찬 충만감을 느꼈다.
“이런 건 언제 계획했어?”
“좀 됐지.”
“프러포즈 때문에 오늘 계속 상태 이상했던 거구나. 어쩐지 평소답지 않게 뚝딱거리더라. 나 진짜 너 컨디션 안 좋나 싶어서 조금 걱정했어.”
“몸 관리야 언제든 착실하게 하는 거 알잖아.”
“그런 너란 걸 잘 아니까 더 걱정이 된 거지. 여행 때문에 무리했나 싶어서.”
“앞으로는 그런 걱정도 안 시킬게.”
“기대가 되네. 호텔로 돌아가면 샴페인이라도 딸까?”
“나쁘지 않지.”
따스한 대화가 주거니 받거니 이어졌다. 연인이 걸을 적마다 흰 모래밭에는 크기 다른 두 쌍의 발자국이 남았더란다. 헨젤과 그레텔이 떨어뜨린 빵 부스러기처럼 사랑을 흘리며, 두 사람은 상대의 빛과 그림자를 기꺼이 나눠 품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천정에 낮게 박힌 보름달이 둘을 굽어보며 겨울의 투명한 빛을 내리비친다. 시안은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설령 잊는대도 이날의 풍경이 제 가슴에 남아 언제까지고 자신의 영혼을 구성하게 될 것이라고 사유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